역대급 하락장을 바라보며
June 20, 2022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동물의 행태를 선용하는 방법을 취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들 가운데 여우와 사자의 행태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주에게는 여우의 영악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모두 필요하고, 때에 따라 여우처럼 혹은 사자처럼 처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모든 금융거래인 - 단기든, 장기든- 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말이다.
지금 시장은 겨울이다. 그것도 아주 혹독한 한겨울.
코로나19로 촉발된 유동성 잔치가 끝난 뒤 청구서가 날아오고 있는 가운데, 41년래 최고의 인플레이션과 사상 최저의 소비자 심리지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장기간의 하락세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위기와 식량위기까지. 이러한 사상 초유의 대 환장 파티에서 필요한 것은 사자의 용맹함이 아닌 여우의 영악함이다.
지금은 여우의 영악함을 가지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2020년 3월 19일 목요일이 떠오른다. 수십수백 수를 가볍게 복기해 내는 프로 바둑 기사들처럼 나는 그날의 주가 흐름을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개장 이후 코스피와 코스닥이 8%대 동반 폭락하면서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됐다. 4거래일 전이었던 13일에도 동반 서킷이 발동된 바 있었지만 19일은 느낌이 달랐다.
지수를 따라 거의 모든 종목들이 장대음봉을 갱신해나가고 있는 가운데, 진단키트 대장 씨젠이 고독하게 시장의 분위기를 역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씨젠마저도 버텨만 줄 뿐, 장 막판까지 변동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장중 내내 하락에 하락을 끊임없이 거듭해나가는 종목들을 번갈아가며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느 정도 시총이 되는 종목들도 매수 대기자가 없는 탓에 매수호가창은 공백으로 군데군데 가격들이 비어있었고, 그런 공백의 호가창에 고통의 파동이 담긴 뭉텅이 물량들이 이따금씩 시장가 매도로 나오며, 띄엄띄엄 걸쳐져 있던 물량들을 죄다 훑고는 더 큰 공백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하루 종일 반복되고 있었다.
우량주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중소형주 종목들의 호가창이 그런 모습이었으니 그런 시장을 지켜보며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노릇일 터.
공포와 분노 그리고 망연자실이 그날 시장의 파동이었겠지만 나는 그날 이상하리만큼 초연했다.
결국 그날이 코로나 팬데믹이 부른 하락장의 최저점이었다. 거의 모든 종목들이 그날을 기점으로 1년 6개월간 상승에 상승을 거듭했고, 그날 관심종목들 중 아무거나 샀어도 1년도 안 돼서 4~5루타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날 장 막바지 씨젠의 강한 변동성에만 합류했을 뿐, 떨어지는 어떤 칼날도 잡지 않았고, 그렇게 어떤 바닥도 잡지 않았다. 거기가 바닥인 줄 몰랐으니까.
어느덧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락이 지속되고 있다 보니, 별 대수롭지 않은 이유들을 대며 시장 바닥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보인다.
상승의 마지막 불꽃이 가장 뜨겁듯, 하락의 마지막 또한 항상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닥은 지나고 나서야만 거기가 바닥이었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김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