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고원에서 깎이는 양털
January 04, 2026
금융위기는 늘 자연재해처럼 설명된다.
갑자기 몰아친 폭풍, 예측할 수 없던 지진, 누구의 책임도 아닌 불가항력.
그러나 시간이 지나 기록이 정리되면, 위기 뒤에는 늘 같은 질문이 남는다.
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가, 그리고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는가.
이 질문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2008년 리먼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반복된 질문은 결국 하나의 의심으로 수렴한다. 정말로 아무도 설계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자들이 있었는가.
IMF 외환위기는 흔히 한국과 아시아의 방만한 금융 관행, 과도한 차입, 취약한 외환 구조의 결과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다. 위기 직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 또 다른 풍경이 드러난다.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자산 가격이 붕괴된 순간, 아시아에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던 글로벌 투기 자본은 가장 싼 가격으로 국가와 기업, 금융 자산을 흡수했다. 구조조정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고, 그 개혁의 비용은 대중과 노동, 중소기업이 치렀다. 반면 아시아에 외환위기를 일으킨 투기 자본은 이후의 회복 국면에서도 가장 큰 수익을 가져갔다.
그래서 소로스와 IMF는 단순한 투자가나 구제금융 기구를 넘어, 위기 이후의 질서를 재편하는 관리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공식 서사는 탐욕스러운 금융기관의 실패, 규제의 부재, 예측 불가능한 붕괴다. 그러나 리먼이 무너진 뒤의 세계를 보면,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파산했고, 일부는 구제되었으며, 일부는 위기 속에서 더 커졌다. 파생상품과 공매도, 신용경색과 유동성 공급 사이에서, 위기는 선택적으로 작동했다. 대중의 자산은 증발했지만, 위기를 만들고 활용할 수 있었던 자들은 오히려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래서 리먼 사태는 실패의 역사인 동시에 부의 재배치가 가장 극적으로 일어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국제 금융세력이라는 말을 꺼낸다. 때로는 특정 인물의 이름으로, 때로는 딥스테이트나 일루미나티라는 상징으로. 이 표현들은 과장되고, 단순화되며, 종종 음모론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완전히 허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비밀 결사단이 존재한다는 의미라기보다, 규모와 정보 그리고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자본 집단이 존재하고, 그들이 구조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글로벌 금융세력의 양털 깎기가 가장 수월해지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판단은, 누군가의 음모를 상정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된다.
현재 세계 경제는 희망의 고원에 서 있다. 실물 경제는 저성장, 고부채로 기초체력이 바닥난 상태지만, 자산 시장은 이와 무관하게 유례없는 고점을 경신하며 낙관론을 노래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라는 실물 경제의 엔진은 식어가는데, 자금의 유동성만으로 부풀려진 금융 시장의 거품이 터질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이한 괴리는 양털 깎기를 준비하는 국제 금융세력에게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 된다.
특히 세계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해온 미국이 더 이상 누적된 위험을 감내하지 못하고 그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순간, 고원의 낙관론은 일순간에 가장 잔혹한 수탈의 현장으로 변모할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비국이며, 동시에 세계 최대의 차입국이다. 국가 부채는 이미 GDP를 훌쩍 넘어섰고, 이자 비용은 국방비에 필적하는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고금리 국면이 길어질수록 미국 정부의 재정 운용은 점점 금리에 종속된다. 금리를 유지하면 이자 부담이 재정을 잠식하고, 금리를 내리면 달러와 자본 흐름에 부담을 준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비용이 발생하는 상태, 이것이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이다.
두 번째 불안은 민간 부문에서 누적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장기간의 저금리 환경에서 레버리지를 극대화했다. 그 결과 상당수 기업 부채가 2025~2027년 사이 재차환 구간에 진입한다. 문제는 이 부채들이 형성된 금리 환경과 지금의 환경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금리가 소폭 인하되더라도, 과거의 자금 조달 조건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투자 축소, 고용 둔화, 기업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용카드,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까지, 미국 가계의 이자 부담은 이미 소비 여력을 잠식하고 있다.
세 번째 취약성은 자산 시장에 있다. 미국 증시는 견고해 보이지만, 그 강세는 극단적인 쏠림 위에 서 있다. 소수의 빅테크와 AI 관련 기업이 지수를 지탱하고 있고, 광범위한 산업과 중소형 기업은 이미 둔화 국면에 들어가 있다. 이는 시장이 건강하다는 신호가 아니라, 균열이 가려져 있다는 신호다. 역사적으로 이런 구조는 작은 충격에도 연쇄 반응을 일으켜 왔다.
여기에 더해 물가는 여전히 2% 목표치를 상회하고 임금 상승률은 둔화되면서, 미국 경제의 70%를 지탱하는 소비 엔진도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세계 경제의 거대한 방벽인 미국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은, 이번 양털 깎기가 과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파괴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해가 지기 직전의 노을이 가장 밝은 법이다. 자산 시장이 내뿜는 이 비현실적인 광휘는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찬란한 낙조일지도 모른다. 고원이 붉게 물들고 모두가 그 화려함에 취해있을 때, 커튼 뒤에서는 이미 가위 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김세은
